서울, 병원, 그리고
5년 만에 돌아온 서울을 누릴 겨를도 없이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여든넷 말기 신질환 환자로 재작년부터 일주일 세 번 투석을 받으며 손자 손녀들 직접 볼 때까지 버티겠다고 홀로 생각해 오셨다더니, 만나기도 전에 우리가 왔다는 소식만 듣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실 줄은 몰랐다. 극도로 쇠약해지신 상태에서 찾아온 급성 담낭염. 병원의 의사도 환자의 체력도 모자라 수술도 할 수 없어 관을 꼽고 배액 하는 시술만 겨우 가능했다. 며칠간 입원하시며 항생제를 투약해 염증은 간신히 가라앉았다지만 오랜 병상 생활로 인한 근육의 소실과 통증 탓에, 원래도 불편하셨던 다리가 이젠 제 기능을 못한다. 휠체어가 아니면 거동도 힘드신 상황이다. 입원하면 자주 나타난다는 섬망 현상 때문에 나에게 몇 번이나 알 수 없는 말을 하셔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곤 한다. 정신은 그래도 온전하셨는데.
엄마는 상황이 더 안 좋다. 마음을 잃는 병, 치매 증상이 심해지셔서 집안은 엉망이고 밖에서도 문제가 많아서 경찰을 몇 번이나 만나셨다고 한다. 아빠는 혼자 병과 싸우고 계시지만 엄마는 온 세상과 싸우고 있다. 미국에 있을 때도 대충 상황을 알아서 오빠에게 제발 요양원에 모셔야 한다고, 그래야 엄마도 다른 가족도 이웃들도 더 큰 고통을 받지 않을 거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본인 삶이 고단한 오빠에겐 통하지 않았다. 아빠도 손을 놓고 한탄만 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바쁜 시부모님이 짬을 내 종종 들여다보셨지만 한 달 한 번 정도의 방문으로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엄마만큼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엄마의 일생을 글로 적으면 아무도 진짜라고 믿지 않을 것만 같다. 신파도 이런 신파는 없을 거라고, 온갖 상투적인 비극과 혼란이 다 담긴 인생의 후반부가 왜 이렇게까지 나빠야 할까? 어쩌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 놓아 버리셨는지도.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5년간 곁에서 못한 효도, 강산이 절반 변한 동안의 불효가 불러온 현타가 장맛비보다 더 거세게 사방에서 들이닥친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어떻게 이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친정 가족들 생각에 매일 눈물바람인데 이 썩어가는 속을, 탈친회 가서 새벽 2시가 되도록 연락도 없는 낭군은 알까.
자세한 건 모르는 채 엄마의 잦은 부재만 겪고 있는 세 아이들은 또 어찌하나. 이것저것 챙겨서 학교도 보내야 하고 치과를 포함한 병원들도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둘째 셋째는 초등학교를 2주라도 갈 수 있고 적응도 잘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큰애. 중학교 측에서 성적 처리하기 복잡하니 2학기 때까지 등교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져 이 긴 방학기간 동안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안 한다, 사춘기가 심하게 와서 뻗대기만 하니 매일 내 속이 뒤집힌다.
누가 그랬다던데. 한국 돌아오면 미국에서의 삶이 전생같이 느껴진다고. 이상하게도 내게는 지금이 더 전생같이 느껴진다. 아프고 슬퍼서 현실감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진짜 내 삶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의도적인 몽롱한 상태 탓인 것도 같고. 이렇게 혼자 글을 쓰는 시간조차 낯설다.
아무튼 오랜만에 한국이지만, 그리고 미국 전화기도 살아 있지만 어디에서도 연락이 잘 닿지 않더라도 - 그런가 보다, 걔는 지금 전생 같고 전쟁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라고 여겨주길 바랍니다. 종종걸음으로 현생을 따라잡아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