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편안히
어제 오후,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내쉬고 모든 짐을 내려놓으셨다. 1950년 전쟁을 피해 내려갔던 시골 어느 빙판길에서 크게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것에 찔린 어린아이. 그렇게 얻은 장애 탓에 거의 평생을 절뚝이며 걸어오신 길이 조용히 끝을 맞았다. 아니, 끝이라 하기엔, 오빠와 나와,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큰 사랑, 손길, 세포들도 오래오래 이어질 테니 너무 서럽게 단정 짓지 않으려 한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아직 우리의 이 길은 이어져 있으니 같이 계속 걸어요. 장애도 설움도 없이, 아버지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 안에서 살아 주세요.
88 올림픽 개막식 같은 특별 방송에, 마농의 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미오와 줄리엣, 대부 등 온갖 영화들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서 챙겨보시던 아버지. 덕분에 친정집에는 이무기마냥 묵은 녹화 테이프들 수십 개가 비교적 최근까지도 쌓여 있었다. 넷플릭스도 디즈니 플러스도 심지어 DVD도 없던 메마른 시절, 영화광들에게 무한감상의 단비를 내려주다 못해 필름에 먼지가 묻거나 훼손될 때마다 진짜 비를 화면에 치지직 내려주곤 했는데...
생방송 시청 중엔 되감기고 빨리감기고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과 달리 바짝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최고는 온 가족이 함께 이불을 등에 감고 앉거나 베개를 베고 누워서 보던 주말의 명화. 정작 같이 본 영화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영화 시작 전 벽시계를 바라보며 이제 곧 시작한다! 오빠와 나의 몸을 들썩이게 하던 흥분은 그대로 남아, 요즘도 밤에 아이들과 영화를 보면 그 기억이 떠오른다. 마지막 승부 같은 드라마는 보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세계 명화는 왜 그리 좋아하셨는지. 그러고 보니 작가의 꿈도 있으셔서 이런저런 글짓기 대회에 응모해 상도 받으셨는데.... 취향의 유전, 아버지의 선물인가.
눈물 대신 좋았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뚝뚝 쏟아내 보려고 애쓰는 중이라, 한 단락으로 시작했던 이 글은 아마도 한동안 수정을 거쳐 계속 길어질 것 같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정말 아픔 없이 편안하길. 사랑해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