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없는 블로그를 읽고 계시다는 분이 계셔서 일단 "고맙습니다" 인사와 더불어 - 문의하신 기프티드 클래스 이야기를 포함한 아이들 학교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 한다.
우리말로는 영재반 혹은 창의반 정도로 부를 수 있을까? 미국 공립학교에 존재하는 기프티드 프로그램은 검색해 보니 주마다 지역마다 선발 방식이 다르다. 아마 부르는 이름도 다를 듯. 이 동네에서 부르는 정식 명칭은 크리에이티브 아카데믹스 Creative Academics, 줄여서 CA다. 편의상 그냥 기프티드 혹은 CA로 적을 예정. 이 글은 플로리다 탈라하시 리온 카운티 Leon County School District 기준, 그중에서도 길크리스트 초등학교 Gilchrist Elementary School와 몽포드 중학교 Montford Middle School 기준 후기임을 밝힌다.
1. 6학년 큰애
*초등학교 기프티드 X. 중학교 기프티드 O?
*미국 온 시점 : 한국 2학년 1학기 마친 후
예민한 첫째에겐 살짝 분리불안 기질이 있다. 눈앞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고, 초등학생이 되어서 학교에 갈 때도 혼자 엘리베이터 타기를 엄청 두려워했다. 학원도 모조리 거부해 그 흔하고 가성비 좋은 한국의 피아노 학원 한 번을 못 가고 방문 선생님을 통해 피아노를 배웠다.
미국 오기 전, 극 방임형 엄마인 내가 유일하게 영어를 미리 가르쳐보려 한 아이가 큰애였다. 머리도 좀 컸겠다, 셋 중 학년도 높으니 가서 가장 고생할 것 같아서 붙잡고 (실제 미국에서는 잘하지도 않는) "하와유 파인 땡큐 앤유" 라도 해보자 했지만 결론은 대차게 실패.
그리하여 큰애는 영어도 ABC만 간신히 익힌 채 분리불안 + 미국 학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너무 불안한 나머지 한글로 영어 독음을 써서 목걸이형 지갑에, 이를테면 "웨얼 이즈 어 레스트 룸?", "캔 아이 콜 마이 마더?" 비상용 표현이 가득 적힌 종이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다. 이러니 부모 입장에선 걱정이 참 많이 됐는데, 의외로 학교에 가장 빨리 적응한 게 큰애였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시골인 데다가 날씨도 따뜻하고 땅도 넓고, 그 속에서 자란 애들은 한없이 착하고 눈치 싸움이니 경쟁도 거의 없고 대학교 덕분에 다양한 인종들이 있고... 찾으려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크게 효과를 본 건 학년을 낮춰서 들어간 게 아닐까 한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국에 왔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 초등학교에서도 2학년으로 편입할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과는 달리 9월 1일 생일을 기준으로 학년을 나누는 미국에서 8월 말 생인 큰애는 갑자기 3학년으로 가야 한다는 날벼락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생일도 고작 며칠 차이인데. 2학년이나 3학년이나 거기서 거기일 수 있지만, 심지어 미국 교육과정은 한국보다 더 쉬워서 한국의 1학년 수준이 미국의 3학년 수준이라는 말도 있지만, 일단 3학년이 되면 FSA라는 플로리다 전체에서 실시하는 표준화 시험을 보아야 한다. 숙제도 당연히 많아지고, 영알못 아이에게 빡셀 것이고...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두 번이나 학교를 찾아가 각서까지 쓰고 큰애를 2학년으로 등록했다. 각서가 뭐 대단한 건 아니다. 첫날 다운 그레이드 시도에 실패한 후 우리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게 문제일까 봐 손 편지를 써서 가져갔더니, 한참을 고민하던 교감 선생님이 "이 편지가 일종의 계약서(각서)니까 여기 아래에 사인하고, 모든 책임을 너희가 지도록 해. 그럼 학년을 낮춰줄게." 이렇게 된 거였다.
2학년 수업이라 내용도 쉽고 아이들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큰애는 별 어려움 없이 빠르게 학교 생활에 적응했다. 물론 영어가 능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단 한 번도 학교 가기 싫다는 말 없이 즐겁게 학교를 다닌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성적도 A가 많아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가끔 성적표가 와도 확인 안 한 때가 많은 방임형 엄마임을 재차 강조) 선생님으로부터 기프티드 이야기는 못 들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그러니까 5학년 면담 때 선생님이 '얘가 기프티드가 아니었나요?' 이런 말씀을 하셔서 혹시라도 애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무관심해서 기회조차 못 얻었나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어쨌든 2, 3, 4학년 담임에게선 아무 언급이 없었고, 애도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둘째가 CA가 되니 "우리 반 CA 애들 중에 성적 안 좋은 애들 많아." 하며 깠을 정도.
그러다 6학년,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본인이 기프티드 수업을 듣게 됐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둘째가 시험을 보고 CA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험도 안 본 큰애가 기프티드하는 게 좀 의아했기 때문이다. 애 말로는 중학교에선 FSA (앞서 말한 플로리다 전체 표준화 시험) 성적대로 기프티드 수업에 배정된다는데, 어쩌면 큰애가 모르는 다른 진짜(?) 기프티드 클래스가 있을지도... 이 부분은 좀 더 알아봐야 할 듯.
1. 4학년 둘째
*초등학교 기프티드 O
*미국 온 시점 : 한국 어린이집 졸업 전
누가 나에게 아이들이 미국에 와서 영어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 언제일까요?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미국 킨더가든 Kindergarten, 그러니까 1학년 되기 직전단계 시점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이들은 다 다르니까 섣불리 말하기 힘들지만 내 경험상 그랬다. 큰애는 좀 늦게 온 덕분에(?) 한글은 완벽했는데 4년 반이 지난 지금도 영어에 한국식 억양이 남아있다. 그에 비해 킨더부터 시작한 둘째는 확실히 미국식 발음을 구사한다. 이곳 아이들도 킨더에서 파닉스를 처음 배우니까 제대로 된 영어 발음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최상의 시기는 킨더인 셈. 게다가 이 때는 돈도 덜 든다. 플로리다의 경우 무상 공립교육이 시작되는 시점이 킨더 들어가기 1년 전, VPK (Voluntary Prekindergarten)부터이긴 한데, 이 경우에도 초등학생들처럼 오후 3시 정도까지 기관에 보내려면 프리스쿨 등록비며 런치번치다 뭐 다해서 추가로 돈이 든다. 하지만 킨더부터는 돈도 안 들고 시간도 늘어나서 여러모로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내 기준) 최상의 시기에 미국에 온 둘째는 예민했던 큰애와는 달리, 내가 어떻게 키웠는지 기억도 안 나고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워낙 조용하고 순한 성격인데, 그랬던 아이가 초반에는 미국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좀 울기도 하고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계속했다. 한데 의외로 단번에 먹혔던 특효약이 있었으니 - 바로 새 가방. 그전엔 한국에서 가져온 가방을 쓰고 있었는데, 마트에 데려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가방을 고르라고 해서 사줬더니 다음날부터 학교 가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게 아닌가. 거의 대부분 물려받은 것만 쓰던 둘째의 설움이 엿보여서 이 부분은 좀 슬프긴 하지만, 아무튼 쉽게 학교 기피를 해결하고 한숨을 돌렸더랬다.
언니처럼 영어도 못했고, 한국에서 한글도 안 떼고 와서 영어 독음을 적은 쪽지를 학교에 들고 갈 수도 없었던 '2개국 까막눈' 둘째는 3개월 후부터 내 발음을 지적하기 시작했고 (엄마, P가 아니라 F 사운드야) 역시나 6개월쯤 후에는 완전히 적응했다. 그리고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게 기프티드 클래스에 딸을 보내고 싶으면 알려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실 나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미국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친하게 지내던 지인의 아이들이 둘 다 기프티드 클래스길래 어떻게 선발이 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일단 아이가 눈에 띄어야 하지만, 엄마가 그쪽에 관심이 있다고 먼저 선생님에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자리가 났을 때 미리 말한 아이에게 기회가 온다. 동양 엄마들이 특히 그쪽에 관심이 많아서 선생님들에게 먼저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따로 말도 안 한 내게 그런 연락이 올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없었던 것. 그런데도 무심했던 내가 연락을 받은 걸 보면 부모가 나서지 않아도 선생님이 먼저 제안해 주시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건 셋째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인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관심 있는 부모라면 먼저 선생님께 말씀드려도 좋을 듯.
여하간 다정했던 Mrs. 몽포드 선생님의 제안을 받은 둘째는 학기 중 교실에서 선생님 지도 아래 두 번의 시험을 보고, 방학 때도 전문 심리학자(Psychologist)와 일정을 잡아서 따로 한 번의 시험을 더 봐서 총 세 번의 시험 끝에 CA 학생이 되었다. 방학 때 시험본 건 내가 약속 잡고 따라가서 알았는데 그전에 두 번 시험본 건 오늘 처음 듣는 얘기였다. 찾아보니 다른 부모들은 그 시험들의 이름이 뭔지, 내용이 뭔지도 알고 심지어 아마존에서 예상 문제집 사서 풀린 엄마들도 있던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게 그냥 아이큐 테스트 정도라는 것만 아는 수준이다. (미안해하진 않을게 얘들아. 엄마 잘못 만나서 힘들겠다만 그래서 너희가 독립적으로 크고 있잖니.)
둘째 덕에 접하게 된 기프티드 클래스는 한국에서 영재반이라고 하면 기대하는 것처럼 뭔가 대단하고 심각한 건 절대 아니다. 일주일 한 번 모여서 CA 선생님과 특별 수업을 하는데, STEM 관련 실험을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역사 공부를 하고 프로젝트 발표를 하거나, CA 티셔츠 맞춰 입고 필드 트립 가는 정도? 창의력 향상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정규 수업을 빠지고 CA 수업을 해서 다른 과목 성적이 떨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법도 하다. 어쨌든 애는 좋아하니 그걸로 됐지만.
사실 초등학교 중학교 기프티드 클래스는 학업 성취도나 진학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게 선배 부모들의 중론. 앞서 말했듯 CA 선발됐지만 성적 나쁜 아이들도 많고 훗날 유명 대학에 가는 것과도 큰 연관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가 CA냐 아니냐에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는 듯.
막내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고, 지난 글에서도 간단히 설명했는데
https://here-now.tistory.com/m/137
2023년 10월 30 업데이트.
행정처리 느리기로 소문난 미국 학교라 이번에도 천천히 진행될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진척이 빨라서 막내는 10월 30일부로 2학년이 되었다. 아이큐 테스트에 가깝다는 기프티드 시험은 어떻게 됐는지 아직 소식이 없는데 아마도 봐야 할 시험 자체가 많아서 확실히 오래 걸릴 듯.
운 좋게 아이들이 학교에서 뒤처지지 않고 잘 다니고 있는데, 나는 진짜 너무 게으른 자유 방임 주의 엄마라 애들 공부를 시키기도 힘들고 (요즘 한글 좀 가르쳐보려 하는데 특히 막내는 진짜 공부 시키려다가 내 수명이 줄어들 지경) 숙제도 제대로 봐준 적이 거의 없다. 그냥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공부 잔소리도 크게 안한다. 그래도 하나 괜찮게 하고 있는 걸 꼽으라면, 아이들 독서 장려?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에 웬만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고, 책이 집 안에서 굴러다니게 하고, 티비나 인터넷보다는 책을 가깝게 하도록 한 게 아이들 학업 성취도와도 연관이 있긴 한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사실 나는 책을 읽으라는 말보다는 책 좀 그만 좀 읽고 밥 먹어라, 운동해라, 몸 좀 움직여라, 이런 말을 더 자주 한다는 것. 그만 읽어라, 읽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어서 책 읽는 청개구리 독서인들인가. 앞으로도 책 좀 그만 읽으라고 잔소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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